'기름은 물보다 가벼워서 물 위에 동동 뜬다는데, 우리도 언젠가는 뜰 수 있을까?'
검은색 밴의 주유구를 열고 초록색 주유기를 꽂아 넣으며 기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 연예인들이 하던 청기백기 게임처럼 노란색, 초록색 주유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오십 여대의 자동차에 기름을 넣다보니 몸이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것 같았다. 알바는 오후 여섯 시에 끝나는데 이제 겨우 세 시라니, 이런 디젤...
주유소 알바라니, 나름 멋있지 않냐?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주유소 알바만큼 기름을 많이 만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왜 그 옛날 영화처럼 습격만 안 당하면 되지.
하긴 기영과 병준은 그동안 참 많은 아르바이트를 경험했었다. 첫 알바로 수능 끝나고 교복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고(연예인이 전단지에 안 찍혀 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받아가지 않아 남은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몰래 버리다 사장에게 걸려 돈을 다 못 받은 기억...), 각종 연회나 행사를 병행하는 뷔페에서 둘리탈을 쓰고 호이호이 하기도 했고, 봄여름가을겨울 면접 보러 다니느라 쌓여가던 정장을 팔기 위해 중고 거래 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주유소 알바를 만만하게 생각한게 사실이었다. 운전자들이 알아서 차를 대면 서부의 총잡이처럼 멋지게 주유기를 꽂아서 차에 꼽고 발사, 하는게 전부일 거야. 병준이 말을 보탰다. 게다가 지난 여름, 2018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오른다는 소식은 주유소로 가는 걸음을 더 가볍게 했다. 왔다갔다 버스비 2,500원을 빼도 점심에 빅맥 세트를 먹을 수 있다니! 평소에 먹지도 않는 빅맥을 왜 꼭 임금 계산할 때만 찾는지 모르겠지만 시급이 오른다는데 빅맥이면 어떻고, 라이스버거면 어떻겠는가?
이제 세 시간이 남았으니 빅맥 세 개는 더 벌 수 있겠다 싶어 콧노래가 절로 나오려던 찰나에 주유소로 덩치가 큰 트럭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트럭이면 경유니까 초록색이지 생각하며 주유기를 꺼내는데, 사무실에서 사장이 달려나왔다.
"얘들아, 오늘 주유기 교체 작업해야하니까 일찍들 들어가라."
"주유기를 바꿔요? 기름 잘 나오던데..."
"아, 기름은 잘 나오는데 수익이 안 나와서, 우리도 이번에 인건비 좀 줄일겸 셀프주유기로 바꾸려고. 요즘은 셀프가 대세 아니냐."
셀프는 물이 셀프 아니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병준이 농담을 던졌지만 기영은 웃지 않았다. 손님이 주유를 하면 우리는 뭘 하는거지, 행사장 풍선춤이라도 춰야하는건가, 실없이 던지는 병준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영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기영과 병준의 주유기를 받아줄 차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 빅맥 살 돈을 벌어야 하는거지, 생각하니 정말로 빅맥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도 오늘 네 시간이나 일했으니 빅맥 하나쯤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난 세트로 먹을꺼야. 감자튀김은 큰 걸로!"
혼자 있고 싶다는 기영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준은 앞장서서 맥도널드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래, 너나 나나 기계한테 밀려 곧 잘릴 신세, 기영은 같이 콜라라도 한 잔 하자 생각하며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려는데,
"손님, 무인 주문 시스템을 이용해주십시오."
라며 카운터의 알바는 손가락으로 기계만 가리킬 뿐이었다.
"저, 제가 지금 빅맥이 너무 먹고 싶거든요. 오늘 일도 네 시간이나 해서 세트로 네 개나 살 수 있거든요. 주문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손님, 키오스크를 이용하시면 기다리지 않고 편하게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저, 기다려도 되고 불편해도 되거든요? 기계 말고 사람이 주문 받아주시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본사 방침이라, 기계에서 셀프로 주문해주시고 출력된 표를 가지고 오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영아, 우리 주문 받은 기계도 예전에는 빅맥 하나 사먹으려고 버스 타고 와서 주문 받던 알바생이었겠지?"
기영과 병준은 말없이 빅맥을 꼭꼭 씹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