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ㅇㅇ항공 ㅁㅁ행 107기 탑승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기영은 다시 한 번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한 후 탑승구에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섰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건네던 농담처럼 신발을 벗고 타지 않도록 신발끈도 다시 조여 맸다. 네 살 때 아버지가 태워주시던 발비행기 이후로 첫 비행기를 탈 생각에 마음은 벌써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살며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탑승 수속을 할 때 직원이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예, 예.`하다가 덜컥 비상구 좌석을 배정받은 것이다. `원래 돈을 더 주셔야 드리는 자리인데 일찍 오셔서 특별히 무료로 드리는겁니다. 대신 비상시 승무원을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는 말은 기영이 연습했던 출국 절차에는 없던 것이었다.
"야, 비행기에서 일어나는 비상사태가 별거 있냐? 하이재킹만 아니면 되지."
수화기 너머 병준의 말에 기영은 비행기에서 새어나온 연료에 라이터를 던지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을 자랑하거나 여행지에서 할 일을 점검해보는 여행객들을 바라보며 기영은 부디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상구 좌석에 앉으니 승무원이 다가와 `앉으신 좌석은 비상시에 저희 승무원들을 도와주셔야 하는 자리인데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기영은 괜찮지 않다고 말할까 하다 앞좌석에 꽂힌 `유료 좌석입니다.`라는 카드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무원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상구 좌석에 앉은 승객들에게 비상구 작동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영은 책자를 꺼내 산소마스크 사용법, 충격방지자세, 비상탈출 유도등과 구명복 착용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를 마친 기영을 태운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야, 밤 아홉시 반에 출발해서 네 시간 비행이라고? 눈 감았다 뜨면 금방이야. 그냥 푹 자!`
모두들 잠이 든 비행기 안에서 기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나 일단 비상사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바다 위를 비행하는 비행기가 비상착수를 하게 된다면? 기영은 머리 위 선반에 보관되어 있다는 구명정 사용법을 다시 한 번 읽고는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승무원들이 움직일 것이다. 기영은 승무원들의 표정과 몸짓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저마다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에 들었지만 기영은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가끔 비행기가 흔들리거나 승무원들이 비행기 통로를 지나다닐 때마다 혹시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여행을 다 망치겠다 싶어 눈이라도 감고 잇으려던 찰나, 승무원 하나가 기영의 앞에서 휘청거리며 앞좌석에 몸을 기댔다.
"비상사태인가요?"
외치는 기영의 말에 승무원은 환하게 웃으며 '제가 발을 헛디뎌서요. 불안해하지 마시고 편하게 쉬십시요.'라고 대답하며 지나갔다. 기영의 목소리에 잠이 깬 옆자리 승객은 혀를 한 번 차더니 다시 수면 안대를 끼고 잠을 청했다. 기영은 민망함에 괜히 앞자리에 꽂힌 '안전한 여행을 위한 안내서'를 꺼내어 훑어보았다. 기영은 '그래, 남들 다 비행기 타고 잘 다니던데 설마 비상사태가 일어나겠어?'는 생각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고 하는데...
쿵쾅쿵쾅
"비상사태다! 제가 뭘 해야하죠?"
기영의 외침에 승무원과 승객들은 모두 기영을 바라보았고, 'ㅇㅇ항공 107기 무사히 ㅁㅁ 국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기영은 얼굴을 가린채 서둘러 비행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