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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1일

[미니픽션]비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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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ㅇㅇ항공 ㅁㅁ행 107기 탑승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기영은 다시 한 번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한 후 탑승구에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섰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건네던 농담처럼 신발을 벗고 타지 않도록 신발끈도 다시 조여 맸다. 네 살 때 아버지가 태워주시던 발비행기 이후로 첫 비행기를 탈 생각에 마음은 벌써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살며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탑승 수속을 할 때 직원이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예, 예.`하다가 덜컥 비상구 좌석을 배정받은 것이다. `원래 돈을 더 주셔야 드리는 자리인데 일찍 오셔서 특별히 무료로 드리는겁니다. 대신 비상시 승무원을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는 말은 기영이 연습했던 출국 절차에는 없던 것이었다.

 

"야, 비행기에서 일어나는 비상사태가 별거 있냐? 하이재킹만 아니면 되지."

 

수화기 너머 병준의 말에 기영은 비행기에서 새어나온 연료에 라이터를 던지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을 자랑하거나 여행지에서 할 일을 점검해보는 여행객들을 바라보며 기영은 부디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상구 좌석에 앉으니 승무원이 다가와 `앉으신 좌석은 비상시에 저희 승무원들을 도와주셔야 하는 자리인데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기영은 괜찮지 않다고 말할까 하다 앞좌석에 꽂힌 `유료 좌석입니다.`라는 카드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승무원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상구 좌석에 앉은 승객들에게 비상구 작동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영은 책자를 꺼내 산소마스크 사용법, 충격방지자세, 비상탈출 유도등과 구명복 착용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를 마친 기영을 태운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야, 밤 아홉시 반에 출발해서 네 시간 비행이라고? 눈 감았다 뜨면 금방이야. 그냥 푹 자!`

 

모두들 잠이 든 비행기 안에서 기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나 일단 비상사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바다 위를 비행하는 비행기가 비상착수를 하게 된다면? 기영은 머리 위 선반에 보관되어 있다는 구명정 사용법을 다시 한 번 읽고는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승무원들이 움직일 것이다. 기영은 승무원들의 표정과 몸짓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저마다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에 들었지만 기영은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가끔 비행기가 흔들리거나 승무원들이 비행기 통로를 지나다닐 때마다 혹시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여행을 다 망치겠다 싶어 눈이라도 감고 잇으려던 찰나, 승무원 하나가 기영의 앞에서 휘청거리며 앞좌석에 몸을 기댔다.

 

"비상사태인가요?"

 

외치는 기영의 말에 승무원은 환하게 웃으며 '제가 발을 헛디뎌서요. 불안해하지 마시고 편하게 쉬십시요.'라고 대답하며 지나갔다. 기영의 목소리에 잠이 깬 옆자리 승객은 혀를 한 번 차더니 다시 수면 안대를 끼고 잠을 청했다. 기영은 민망함에 괜히 앞자리에 꽂힌 '안전한 여행을 위한 안내서'를 꺼내어 훑어보았다. 기영은 '그래, 남들 다 비행기 타고 잘 다니던데 설마 비상사태가 일어나겠어?'는 생각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고 하는데...

 

쿵쾅쿵쾅

 

"비상사태다! 제가 뭘 해야하죠?"

 

기영의 외침에 승무원과 승객들은 모두 기영을 바라보았고, 'ㅇㅇ항공 107기 무사히 ㅁㅁ 국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내방송을 들으며 기영은 얼굴을 가린채 서둘러 비행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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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앍
    2018년 3월 8일

    '기름은 물보다 가벼워서 물 위에 동동 뜬다는데, 우리도 언젠가는 뜰 수 있을까?' 검은색 밴의 주유구를 열고 초록색 주유기를 꽂아 넣으며 기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즐겨보던 예능 프로그램 연예인들이 하던 청기백기 게임처럼 노란색, 초록색 주유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오십 여대의 자동차에 기름을 넣다보니 몸이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것 같았다. 알바는 오후 여섯 시에 끝나는데 이제 겨우 세 시라니, 이런 디젤... 주유소 알바라니, 나름 멋있지 않냐?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주유소 알바만큼 기름을 많이 만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왜 그 옛날 영화처럼 습격만 안 당하면 되지. 하긴 기영과 병준은 그동안 참 많은 아르바이트를 경험했었다. 첫 알바로 수능 끝나고 교복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고(연예인이 전단지에 안 찍혀 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받아가지 않아 남은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몰래 버리다 사장에게 걸려 돈을 다 못 받은 기억...), 각종 연회나 행사를 병행하는 뷔페에서 둘리탈을 쓰고 호이호이 하기도 했고, 봄여름가을겨울 면접 보러 다니느라 쌓여가던 정장을 팔기 위해 중고 거래 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주유소 알바를 만만하게 생각한게 사실이었다. 운전자들이 알아서 차를 대면 서부의 총잡이처럼 멋지게 주유기를 꽂아서 차에 꼽고 발사, 하는게 전부일 거야. 병준이 말을 보탰다. 게다가 지난 여름, 2018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오른다는 소식은 주유소로 가는 걸음을 더 가볍게 했다. 왔다갔다 버스비 2,500원을 빼도 점심에 빅맥 세트를 먹을 수 있다니! 평소에 먹지도 않는 빅맥을 왜 꼭 임금 계산할 때만 찾는지 모르겠지만 시급이 오른다는데 빅맥이면 어떻고, 라이스버거면 어떻겠는가? 이제 세 시간이 남았으니 빅맥 세 개는 더 벌 수 있겠다 싶어 콧노래가 절로 나오려던 찰나에 주유소로 덩치가 큰 트럭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트럭이면 경유니까 초록색이지 생각하며 주유기를 꺼내는데, 사무실에서 사장이 달려나왔다. "얘들아, 오늘 주유기 교체 작업해야하니까 일찍들 들어가라." "주유기를 바꿔요? 기름 잘 나오던데..." "아, 기름은 잘 나오는데 수익이 안 나와서, 우리도 이번에 인건비 좀 줄일겸 셀프주유기로 바꾸려고. 요즘은 셀프가 대세 아니냐." 셀프는 물이 셀프 아니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병준이 농담을 던졌지만 기영은 웃지 않았다. 손님이 주유를 하면 우리는 뭘 하는거지, 행사장 풍선춤이라도 춰야하는건가, 실없이 던지는 병준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영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기영과 병준의 주유기를 받아줄 차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 빅맥 살 돈을 벌어야 하는거지, 생각하니 정말로 빅맥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도 오늘 네 시간이나 일했으니 빅맥 하나쯤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난 세트로 먹을꺼야. 감자튀김은 큰 걸로!" 혼자 있고 싶다는 기영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준은 앞장서서 맥도널드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래, 너나 나나 기계한테 밀려 곧 잘릴 신세, 기영은 같이 콜라라도 한 잔 하자 생각하며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려는데, "손님, 무인 주문 시스템을 이용해주십시오." 라며 카운터의 알바는 손가락으로 기계만 가리킬 뿐이었다. "저, 제가 지금 빅맥이 너무 먹고 싶거든요. 오늘 일도 네 시간이나 해서 세트로 네 개나 살 수 있거든요. 주문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손님, 키오스크를 이용하시면 기다리지 않고 편하게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저, 기다려도 되고 불편해도 되거든요? 기계 말고 사람이 주문 받아주시면 안 되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본사 방침이라, 기계에서 셀프로 주문해주시고 출력된 표를 가지고 오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영아, 우리 주문 받은 기계도 예전에는 빅맥 하나 사먹으려고 버스 타고 와서 주문 받던 알바생이었겠지?" 기영과 병준은 말없이 빅맥을 꼭꼭 씹어 먹었다.
  • 윤비
    2017년 12월 5일

    "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 그는 나를 보고 다 마신 소주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 아. 미안해요. 시끄러웠죠. 내가 술 마시면 주사가 수다에요. " " 아니, 시끄러웠다기보담은...이 많은 말을 쏟아 내고 싶어서 힘들었겠다. 싶어서..." 하하하..나는 박수까지 쳐 가며 맞다는 듯 깔깔대고 웃었다.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만들어 마신 탓에 빠르게 취기가 올라왔다. " 준영씨 참 재밌네요. " " 준영씨? 술 마시기 전엔 오빠라드니. 새삼 내외하네. " " 이러나 저러나 오빠 좀 그렇잖아요. 그냥 아는 사람도 오빠. 옆집 남자도 나이 한살만 많아도 오빠, 대학교 동아리 선배도 오빠. 가볍고 그래 보여요 가끔. " " 뭐...그럼 자기라고 하든지. " 자기.라는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나는 얼어붙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잔.. 그 어감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알콜의 힘 때문에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여자를 좀 안다는 남자의 능글한 작전일까. " 눈에서 레이저빔 나오겠네. 술 취한거 맞아요? 아님 내가 잘 생겨서 보는 건가? " " 이봐. 이럴거 같았어. 왕자병도 적당히 하시죠. " " 아니면 이렇게 나랑 술 마셔주는 이유가 뭐에요? 솔직히 외로워서.. 단순히 팍 불 튀어서 자자는게 아니라..그런거 아닌가? 서로 알고 지냈고 뭐..인사 정도지만. 그것도 반년이면 낯선 사람도 아니고 이만 하면은.. " " 내가 준영씨를 받아줘야 한다? 그건가요? " " 강요가 아닌 부탁이죠. " " 난 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말 잘하는 거, 매너 좋은 거 그래서 여자들이 그냥 둬도 줄 서는거 부담스러워요. " " 에이. 여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남자가 방금 말한 그거 다인데 그럼 날더러 여자 하라는 거예요? " 역시 말빨로는 이길 수가 없다. 그의 대답이 틀린 말도 아니고. 머리가 핑 돌았다. 알싸하게 기분이 좋으면서 자꾸만 해실해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웃음이 세 나왔다. " 이렇게 잘 웃으면서..." " 뭐라구요? " " 이렇게 잘 웃는데 왜 안 보여주냐구요. 웃는거를. " " 비밀이에요. " " 허.. 비밀도 많다. 별게 다 비밀이래네. " 같은 아파트 같은 동. 층수만 다르게 살았던 그와 나는 이웃집 사람이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회사나 다니겠지 했는데 미술학과 교수라고 했다. 그랬던 남자는 어느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스케치 해 그린 것을 내밀어 보이며 친구나 하자고 했다. 처음엔 별 이상한 남자 다 보겠네. 했는데 보기와는 달리 재미 있는 타입 같았다. " 내가 말이에요." " 뭐요? " " 아니다. 됐어요." 술집을 나와 아파트로 걸어가는데 눈이 왔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망설였다. " 남자가 무슨 말을 하다가 마냐. 진짜. 화장실 갔다가 뒷처리 안한거 같잖아~아~" 술이 들어가 말이 짧아지고 어간 사이는 길어졌다. " 누드 모델 한번 해 달라면 해 줄수 있어요? " 퍽----!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그의 가슴팍으로 집어던졌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 아~~ 미안 미안. 취소. 실수했네. 미안해요. " 그를 두고 비척비척 앞서 걷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듯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와선 취했네 하며 나를 들춰 업었다. 준영씨의 등이 따뜻하고 듬직했고 포근한 느낌에 슬슬 잠이 왔다. "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내 취한 두 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만일 그대 내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 사랑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 가득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자장가처럼 나즈막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나이에 첫 사랑을 위해 만든 노래들이 담긴 음반이 처음이자 유작이 된 유재하씨의 노래였다. " 아무리 그래도 누드모델이 뭐야 누드 모델이..어이가 없을만 했네. 기가 찬다. 기가 차. 성희롱으로 신고 안한게 다행이지 무슨..좋아한단 말을 하는 게 누드 모델이라니..허!! " 귀엽네. 이 남자. 선수인줄 알았더니 아닐수도 있겠네? " 아이 그런데 술을 먹어 그런가 눈이 와서 그런가 꽤 무겁네. " 다리를 받친 손이 업은 나를 다시 얼른다. 살짝 미안하지만 그래서 더 호감이었다. " 그거 언제 해요? " " 뭐야... 자는지 알았더니 아니였어요? " " 시끄럽구 그거 언제 해 주면 되요? " " 그거라니...뭐요? " "그 모델... 해 달라는거요. " " 진짜 하게? 근데 좀 무게도 그렇고 몸도 영~" " 뭐에요? 에이 진짜! " 준영씨는 나를 업은체 헤드락을 당했다. 한참을 시뻘건 얼굴로 켁켁 거리다 말했다. " 근데 모델 해 주고 나면 다른 남잔 내가 못 만나게 할텐데...? " " 처음부터 그림이 목적 아닌거 알았다구요. 김준영씨. " " 오호~ 역시. 예쁘게 그려 줄께요. " 창밖으로 내리는 눈은 어느새 가느다란 눈에서 굵은 함박눈이 되어 있었고 준영씨는 눈보다 더 따스한 미소로 내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 이동훈(꼬망글)
    2017년 11월 24일

    그래,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때 그 기억을 생각했을 때 후회라는 단어가 아니라 아, 좋은 추억이었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를. 어제 있었던 일 조차도 오늘이 되면 아, 어제는 대체 왜 그랬지 라는 말보다 아, 어제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는 말이 생각날 수 있기를. 무언가를 생각할 때 다른 단어들 보다 가장 먼저 추억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는 네가 있어줬다는 감정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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