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
그는 나를 보고 다 마신 소주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 아. 미안해요. 시끄러웠죠. 내가 술 마시면 주사가 수다에요. "
" 아니, 시끄러웠다기보담은...이 많은 말을 쏟아 내고 싶어서 힘들었겠다. 싶어서..."
하하하..나는 박수까지 쳐 가며 맞다는 듯 깔깔대고 웃었다.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만들어 마신 탓에 빠르게 취기가 올라왔다.
" 준영씨 참 재밌네요. "
" 준영씨? 술 마시기 전엔 오빠라드니. 새삼 내외하네. "
" 이러나 저러나 오빠 좀 그렇잖아요. 그냥 아는 사람도 오빠. 옆집 남자도 나이 한살만 많아도 오빠, 대학교 동아리 선배도 오빠. 가볍고 그래 보여요 가끔. "
" 뭐...그럼 자기라고 하든지. "
자기.라는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나는 얼어붙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잔.. 그 어감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알콜의 힘 때문에 망각한 것일까. 아니면, 여자를 좀 안다는 남자의 능글한 작전일까.
" 눈에서 레이저빔 나오겠네. 술 취한거 맞아요?
아님 내가 잘 생겨서 보는 건가? "
" 이봐. 이럴거 같았어. 왕자병도 적당히 하시죠. "
" 아니면 이렇게 나랑 술 마셔주는 이유가 뭐에요?
솔직히 외로워서.. 단순히 팍 불 튀어서 자자는게 아니라..그런거 아닌가? 서로 알고 지냈고 뭐..인사 정도지만. 그것도 반년이면 낯선 사람도 아니고 이만 하면은.. "
" 내가 준영씨를 받아줘야 한다? 그건가요? "
" 강요가 아닌 부탁이죠. "
" 난 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말 잘하는 거, 매너 좋은 거 그래서 여자들이 그냥 둬도 줄 서는거 부담스러워요. "
" 에이. 여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남자가 방금 말한 그거 다인데 그럼 날더러 여자 하라는 거예요? "
역시 말빨로는 이길 수가 없다.
그의 대답이 틀린 말도 아니고.
머리가 핑 돌았다. 알싸하게 기분이 좋으면서
자꾸만 해실해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웃음이 세 나왔다.
" 이렇게 잘 웃으면서..."
" 뭐라구요? "
" 이렇게 잘 웃는데 왜 안 보여주냐구요. 웃는거를. "
" 비밀이에요. "
" 허.. 비밀도 많다. 별게 다 비밀이래네. "
같은 아파트 같은 동. 층수만 다르게 살았던 그와 나는 이웃집 사람이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회사나 다니겠지 했는데 미술학과 교수라고 했다.
그랬던 남자는 어느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스케치 해 그린 것을 내밀어 보이며 친구나 하자고 했다.
처음엔 별 이상한 남자 다 보겠네. 했는데
보기와는 달리 재미 있는 타입 같았다.
" 내가 말이에요."
" 뭐요? "
" 아니다. 됐어요."
술집을 나와 아파트로 걸어가는데 눈이 왔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망설였다.
" 남자가 무슨 말을 하다가 마냐. 진짜.
화장실 갔다가 뒷처리 안한거 같잖아~아~"
술이 들어가 말이 짧아지고 어간 사이는 길어졌다.
" 누드 모델 한번 해 달라면 해 줄수 있어요? "
퍽----!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그의 가슴팍으로 집어던졌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 아~~ 미안 미안. 취소. 실수했네. 미안해요. "
그를 두고 비척비척 앞서 걷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듯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와선 취했네 하며 나를 들춰 업었다. 준영씨의 등이 따뜻하고 듬직했고 포근한 느낌에 슬슬 잠이 왔다.
"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내 취한 두 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만일 그대 내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 사랑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 가득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자장가처럼 나즈막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나이에 첫 사랑을 위해 만든 노래들이 담긴
음반이 처음이자 유작이 된 유재하씨의 노래였다.
" 아무리 그래도 누드모델이 뭐야 누드 모델이..어이가 없을만 했네. 기가 찬다. 기가 차.
성희롱으로 신고 안한게 다행이지 무슨..좋아한단 말을 하는 게 누드 모델이라니..허!! "
귀엽네. 이 남자.
선수인줄 알았더니 아닐수도 있겠네?
" 아이 그런데 술을 먹어 그런가 눈이 와서 그런가
꽤 무겁네. "
다리를 받친 손이 업은 나를 다시 얼른다.
살짝 미안하지만 그래서 더 호감이었다.
" 그거 언제 해요? "
" 뭐야... 자는지 알았더니 아니였어요? "
" 시끄럽구 그거 언제 해 주면 되요? "
" 그거라니...뭐요? "
"그 모델... 해 달라는거요. "
" 진짜 하게? 근데 좀 무게도 그렇고 몸도 영~"
" 뭐에요? 에이 진짜! "
준영씨는 나를 업은체 헤드락을 당했다.
한참을 시뻘건 얼굴로 켁켁 거리다 말했다.
" 근데 모델 해 주고 나면 다른 남잔 내가 못 만나게 할텐데...? "
" 처음부터 그림이 목적 아닌거 알았다구요. 김준영씨. "
" 오호~ 역시. 예쁘게 그려 줄께요. "
창밖으로 내리는 눈은 어느새 가느다란 눈에서 굵은 함박눈이 되어 있었고 준영씨는 눈보다 더 따스한 미소로 내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